아침 일곱시가 가까운 시간인데도 한밤중 같다. 어제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밤을 꼬박 세우고도 여태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마치 장마비처럼 내린다. 엊그제가 우수였는데, 겨우내 얼었던 것들이 한꺼번에 녹아 내리는 모양이다.
동대문 이스턴 호텔 앞 길가에는 여기저기로 떠나는 버스들이 줄을 지어 엔진을 덥히고 있다. 버스마다 이런저런 산악회의 이름을 걸고 있다. 삼삼오오 모여든 사람들이 제각기 타고 갈 버스에 오르고, 나도 ‘산○○’ 표지가 붙은 버스를 찾는다. 이런 우중에도 산행을 떠나는 사람들이 참 많기도 하다. 내게는 아직도 생경한 풍경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은 날씨 때문에 부득이하게 산행 경로를 줄였다고, 원주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산행대장이 공지를 한다. 부곡리에서 출발하여 향로봉과 남대봉을 거쳐 영원사로 하산하려던 계획이 성남리에서 남대봉에 올랐다가 곧바로 영원사로 내려가는 것으로 바뀌었다. 겨우 치악산의 끝 자락만 살짝 밟아보고 가는 셈이니 못내 아쉽다.
치악산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번째는 1989년이었다. 산에 녹지 않은 눈과 얼음이 꽤 남아 있었으니, 짐작컨대 그때도 이맘때였을 것이다. 어느 봉우리에 올랐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비로봉이었던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다. 15년이란 세월로 인해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내 자신이 그때 어디를 오르고 있었는지 별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분명한 것은 경험도 준비도 전혀 없는 상태로 산에 올랐다가 무척이나 애를 먹었었다는 사실이다.
성남리 매표소에서 상원사까지는 5.2km의 계곡을 거슬러 올라야 한다. 등산로에는 진창과 얼음이 뒤섞여 있다. 아직 녹지 않은 두꺼운 얼음 위로 계곡수가 힘차게 쏟아져 내리며 장관을 이루는데, 나는 발 디딜곳을 찾느라 조심조심 길바닥만 보고 걷는다. 정상부는 짙은 운무에 가려져 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사람들의 모습도 점점 희미해진다.
사람들의 모습이 산과 더불어 점점 희미해진다.
상원사에 도착했을 때도 여전히 비는 그치지 않는다. 점심을 먹어야 하는데 마땅히 비 피할 곳이 없다. 일행 중 일부는 비를 맞는 채로 또 일부는 스님의 양해를 얻어 법당 뒤편에 있는 창고에 들어가 자리를 편다. 비좁고 불편했지만 비바람을 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다. 그런데 걷기를 멈추니 땀이 식으면서 춥다. 거기다 차가운 밥을 넘기자니 오들오들 떨리기까지 한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보온도시락이 부럽다.
점심을 먹고 창고에서 나오니 비가 눈으로 바뀌어 있다. 눈보라가 얼굴을 때린다. 남대봉으로 가는 갈림길을 그냥 지나친다. 몇 백 미터만 더 가면 남대봉 정상인데, 악천후로 인해 바로 하산하기로한 모양이다.
그런데 서둘러 내려오면서 문득, 까치의 보은 설화가 그려져 있다는 상원사의 설화 벽화도, 그 설화 속의 까치가 울렸다는 종도 둘러보지 못했음을 깨닫는다. 뭐가 그렇게 급했을까. 늘 그렇듯 나는 오르고 내리는 일에만 너무 급급하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것이다. 아쉬움에 아쉬움을 또 더한다.
선두를 이룬 한 무리의 사람들에 섞여 걷는다. 내 시선은 여전히 바닥에 맞추어져 있다. 아무 말 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리지도 않고 걷는 모습은 누가 보면 마치 무슨 생각에 깊이 빠져있는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은내발이 진창에 빠져있을 뿐이다. 아니다. 무슨 생각을 했는지 다음 순간이면 까맣게 잊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사실이 무엇이거나 어쨌든 이것도 무아지경이라면 무아지경인 셈이다. 그런데 어느 순간 문득 고개를 들어 둘러보니 앞으로도 뒤로도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인적 없이 텅 빈 계곡에 눈만 내린다.
눈 내리는 영원골. 아무도 지나가지 않을 것처럼 고적하다.
15년 전, 함께 이 산을 올랐던 동료들 중에 아직도 회사에 남아 있는 사람은 나를 포함해서 단 둘뿐이다. 세월은 이렇게 같이 길을 가던 이들을 하나 둘 지운다. 삶의 여기저기에 숨어 있는 갈림길을 만날 때마다, 우리는 제각기 조금씩 혼자가 된다. 점점 드문드문해지다 어느 순간, 지금처럼, 길 위에는 나 혼자만 남겨지는 날이 오는 것이다. 그때의 내 뒷모습이 마치 눈 앞의 영상처럼 떠오른다. 그런 날 너무 쓸쓸하지 않게, 지금 나는 무리에 섞여 걸으면서도 혼자가 되는 연습을 한다.
2004.2.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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