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예보 지난 금요일, 나는 설악산으로 무박 산행을 갔었다. 그날 전국적으로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있었다. 강수확률은 오전 40%, 오후 60%, 합하면 100%, 빈 틈 없이 꽉 찬확률이었지만 비는 오지 않았다. 물론 나도 안다. 지금 내 계산 방식이 엉터리라는 것쯤.
오색 끊임없이 이어지는 불빛들이 마치 하늘의 컴컴한 갱도로 줄을 지어 올라가는 광부들 같다. 그 어둠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을 캐려는 것일까. 나도 작은 불빛 하나를 달고 그 대열 속에 들어가 섰다.
오르막 오색에서 대청봉에 오르는 5km. 그 길이 내리막이었던 적은 있으나 오르막이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오르고 싶지 않았던 길, 그러나 올라가고 있는 길. 그나마 한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어두웠다는 것이다. 불빛은 그 아득한 높이와 가파른 경사 앞에서 오르기도 전에 지레 질려 버리지 않아도 좋을 만큼만 길을 보여줬다. 발 밑의 두어걸음 앞만 내려다보고 걸었다. 근시안적이라고? 천만에. 다만 나는 내 앞의 한 걸음이 힘에 겨웠을 뿐이다. 어둠 속에서는 그저 그만큼씩만 올라가면 되는 것이다. 비오듯 땀이 쏟아졌다. 하지만 시원했다. 그렇게 쏟아내고 나면 나를 끌어당기는 세상의 중력으로부터 조금은 가벼워질 것도 같았다.
대청봉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가시거리는 짧아졌다. 마지막 계단길은 그 끝이 마치 구름 속으로 이어진 것처럼 보였다. 그 속으로 들어가 이 몸조그만 물방울로 맺혀지고 싶었다. 구름에 덮인 산. 나는 구름을 밟고 걸었다. 누가 말했던가. 높이는 전망이 아니라고.
서북능선 애당초 계획은 정상에서 천불동을 거쳐 설악동으로 내려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저런 사정으로 인해 목적지가 한계령으로 바뀌었다. 서북능선. 작년 가을, 나는 같은길을 걸으며 노랗고 빨간 단풍잎 세 개를 산 몰래숨겨왔었다. 그리고 어느 책인가 아무렇게나 펼쳤던 페이지와 페이지 사이에 옮겨 놓고는 이렇게 적었었다. 내가 지금 지나간 시절의 마른 장미꽃을 추억하듯 언젠가 오늘을 추억할 날도 있을 것이다.
한계령 저 산은 내게 오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젖은 계곡 첩첩산중 저 산은 내게 잊으라 잊어 버리라 하고 내 가슴을 쓸어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내게 내려가라 내려가라 하네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공중전화 더 걷고 싶었지만 거기서 멈춰야 했다. 내 발이 너무 무거웠다. 산을 내려온 사람들은 제각기 자신의 전화기를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다시 일상의 부근으로 돌아왔음을, 곧 돌아갈 것임을 전하고 있었던 것일까. 휴게소 귀퉁이의 공중전화 부스는 텅 비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그때 어떤 번호 하나를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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