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텅 비어 있는 여기저기에 누구에게나처럼 벌레는 운다 幸福하고 싶었던 그 시절이 실은 행복한 시절이었다 - 이형기 <불행>
이 글은 그때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보고 듣고 생각했는가에 대한 기록이 아니다. 실제로 그 여행과 관련하여 남겨진 기록은 변변치 않다. 내가 머물렀거나 지나갔던 도시들의 이름과, 몇 개의 짤막한 메모들과, 스무 장쯤 되는 사진들이 전부다. 지금은 기억마저도 이빨이 빠져 듬성듬성하다.
그 무렵의 나는 뭔가를 써서 남긴다는 것에 몹시도 인색했었다. 흥미도 이유도 없었고, 아마 할 수만 있었다면 기왕의 기억들조차도 다 지워버리려고 했을 것이다. 나는 그때 내 삶에서 가장 불행한 계절의 한복판에 있었다. 그렇게 믿었었다. 따라서 가능하면 빨리, 그리고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지나가버려야 했다.
그러나 돌아보면 “행복하고 싶었던 그 시절이 실은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적어도 그때는, 마음만 먹는다면, 갈 수 있는 길이 지금보다는 훨씬 많았다. 지난 10년 동안 아무 생각 없이 지나쳐버린 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이제 잠시 숨을 고르려고 한다. 행복하고 싶었던, 그래서 행복했던, 지난 시절로의 여행을 꿈꾸면서 말이다.
다만, 내가 그 시간 속으로 다시 돌아가기 위해서는, 마치 고고학자가 몇 조각의 유물들을 맞춰 지나간 역사를 복원해내듯, 남겨진 단서들을 따라가며 잊어버렸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살려야만 한다. 이미 사라져버린 조각들의 자리는 새롭게 채워야 할 것이다. 앞으로 얼마 동안은 그런 일들로 조금은 즐거워질 것 같다. 그때가 행복했던 시절이었다는 또 다른 증거인 셈이다.
- 계속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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