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마포대교를 건너는 중이다. 공덕동 로터리에서 계속 이어지는 마포로를 타고애오개, 아현로터리, 서대문로터리를 차례로 지나 새문안길로 접어든다. 여기까지는 가끔 너와 함께 지나곤 했던 길이다.

이쯤에서 나는 눈을 감고 상상을 한다. 너는 조수석에 앉아 노래를 부르고 있다. 노랫소리는 어느 비오던 날의 첫키스처럼 촉촉하게 내 안으로 젖어든다. 그러나 눈을 뜨면 노랫소리는 사라질 것이다. 대신 너는 지금 먼 곳에서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을 위해 노래를 부르고 있을 것이다. 그곳까지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좌측에 이순신장군의 동상을 두고 직진하면 종로다. 그대로 종로를 관통하면 지도에는 흥인지문이라 적힌 동대문이 나오고 거기서부터는 왕산로를 탄다. 신설동로터리, 용두동사거리, 제기동사거리를 지나면 청량리다. 왕산로는 여기서 끝나고 망우로가 이어진다. 지금부터 회기까지는 겨우 한 뼘도 되지 않는다. 서두르지 않아도 곧 그곳에 이르게 될 것이다.

시립대 입구를 지나 직진을 하면 회기역이 있는, 드디어 휘경동로터리다! 사거리에서 서울은행과 기업은행을 각각 좌우에 두고 직진하면, 그래, 지금 내 손가락이 짚고 있는 바로 이쯤에 네가 있을 것이다. 나는 마치 네가 보이기라도 하는듯 반갑고 기쁘다. 그러다 이내 시무룩해진다. 지도 위에선 고작 몇 페이지를 뒤적거려서 갈 수 있는 거리인데…. 이렇게 너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어야만 하는 나는 쓸쓸하다.

나는 손가락이 가리킨 그 부근에서 어쩔 줄을 모르고 섰다가 맥없이 다시 돌아선다. 왔던 길인데 돌아서니 몹시도 낯설다. 길을 잃을 것만 같다. 지도 속의 수많은 글자들이 제각기 쓸쓸하게 흩어져 있다. 망우로, 시립대입구, 청량리, 제기동…. 나는 지도책을 덮어버린다.

갑자기 배가 고프다. 생각해보니 점심을 걸렀다. 잘하면 저녁도 거르게 될 듯하다. 바깥은 아직 환하다. 몹시도 환하다. 이제 일곱시도 되지 않았다. 여덟시나 아홉시 열시 혹은 열한시는 감감하게도 멀다. 뱃속의 허기보다도 더 멀다.

은빛 담배 케이스를 열고 담배 한 개피를 꺼낸다. 어느 틈엔가 너는 그 안에서 웃고 있다. 딸깍딸깍 소리를 내며 여러 번 케이스를 열었다 닫아 본다. 그때마다 스티커 사진 속의 너는 소리없이 웃고 있다. 그 사진을 찍었던 날이 언제였을까.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너는 왠지 조금 슬퍼 보인다. 담배연기가 너의 웃음 근처를 스쳐 허공 중으로 흩어진다. 흩어지는 담배연기도 쓸쓸하다.

전화기를 내려다 본다. 수화기에 연결된 선이 몇 바퀴쯤 비비 꼬여져 있다. 전화가 오지 않는 것은 어쩌면 저렇게 꼬인 중간 어디쯤이 막혀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수화기를 들어서 꼬인 줄을 푼다. 다 풀었는데 그래도 전화벨은 울리지 않는다.

뱃속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밥이나 먹으러 갈까? 뭘 먹지? 어디 가서 먹지? 생각을 해보니 배는 고픈데 식욕은 없다. 식욕을 잃고도 배가 고프다는 것은 참 우습고 서글프다. 사무실 구석에 놓인 커피메이커에는 식은 커피가 반쯤 채워져 있다. 그 옆에 잎이 넓은 난초 화분 하나 소리도 향도 없이 놓여 있다.

다시 지도책을 열어본다. 47페이지 오른쪽 상단 구석에 회기역이 보인다. 지금쯤 전철이 지나가고 있는지 페이지가 살짝 흔들린다. 그런데, 조금 전 책을 덮었을 때 그 부근 어디서 어슬렁거리던 내가 보이지 않는다. 맙소사,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대신 조명이 반쯤 꺼진 사무실에 그림자처럼 누군가 앉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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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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