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또 몇 년이나 지났을까? 11월 마지막 날 밤이었던 것만 기억이 난다. 어머니 생신이었거든. 그날도 그래서 생일 케익을 사러 갔었지. 아마 너에게도 그렇게 말했을 거야.

동네 어귀에 빵집이 두 개 있었는데, 그날 처음에 들렀던 빵집에서는 무슨 이유에선가 케익을 사지 못하고 그냥 나와야 했지. 지금 생각해 보니 어쩌면 그게 그날의 해후를 알리는 전조였던 것도 같아.

기억 나니? 다소 때 이른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밤이었어. 어깨 위로 머리 위로 쌓이는 눈을 털어내며 두 번째 빵집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지. 누군가가 내 이름을 불렀어. 부드럽고 달콤한 빵 냄새 때문이었을까? 그 목소리에서 향기가 느껴졌던 것은?

그 소리를 따라 누군가가 진열대 뒤쪽에서 나와 내 쪽으로 걸어왔어. 보송한 볼살을 가진 예쁜 아줌마, 바로 너였지. 난 짐짓 못 알아본 척 했지만 마음 속으론 벌써 “너 ○○ 맞지?” 하고 말을 건네고 있었어.

고등학교 때 만났던 후로 그때가 아마 처음이었을 거야. 우리학교 시화전에 네가 왔었잖아. 그런데 네가 거기 오게 된 것도 참 우연이었지.

네가 오기 전날 네 동생이 왔었어. 물론 네 동생인줄 나는 몰랐지. 방명록을 쓰고 있을 때 마침 내가 옆에 있었는데, 그 순간 어쩌다 내 입에서 네 이름이 튀어나왔을까. 아마 네가 드문 성(姓)을 가졌고 돌림자가 들어 있는 동생의 이름이 네 이름을 연상시켰었나 봐. 어쨌든 그게 계기가 되어 너에게까지 연결이 된 거지. 그리고 이건 그 동안 말할 기회가 없었는데, 네가 왔다 간 후로 내 친구들이 너 누구냐고 상당한 관심을 보였던 거, 몰랐지? 너 참 예뻤었거든.

그렇게 만났던 날 이후로 처음이었으니 그게 몇 년 만이었을까? 십 년? 십오 년? 나이가 많아지다 보니 요즘엔 그런 거 계산이 잘 안 된다. 아무튼 반가운 내색을 하고 싶었는데, 그때도 지금도 내가 감정을 드러내는 데는 좀 서툴거든.

우리가 아마 3학년 때 같은 반이었지? 기억 나니? 기찻길 옆, 좁은 골목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던 우리 동네 말이야. 그 철로엔 지금도 기차가 다닐까? 그 골목길엔 아직도 고만고만한 아이들이 우르르 몰려다니곤 할까? 지금은 많이 변했을 거야 그 동네. 너나 나처럼.

지나간 시절은 다시 돌아갈 수 없다는 이유만으로도 사람의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드는 것 같아. 거기 꼭 특별한 것이 있지 않아도 말이야. 생각해 봐, 밖에는 눈이 펑펑 내리는 밤, 이제는 어른이 된 어린 시절의 동무와 우연히 마주친다는 것. 제법 분위기 좋은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

그런데 케익을 포장하는 동안, 그리고 돈을 내고 다시 케익 상자를 건네 받을 때까지 내내, 나는 뻣뻣한 나무처럼 너무 어색하게 서있었던 거야. 그때 내 모습을 나는 못 봤지만 너는 봤을 텐데, 상상해보면 참 재미 없었을 것 같아.

그 해 크리스마스에 내가 카드를 보냈는데, 받았을까? 주소를 몰라서 그냥 동네 이름하고 상호만 적어서 보냈거든. 지금이니까 하는 말이지만, 혹시라도 답장이 오지 않을까 기대도 했었어. 그래서 아쉬웠냐고? 글쎄. 그건 비밀이야.

그 뒤로 고향에 갈 때마다 너네 빵집 앞을 지나가곤 했으면서도 다시 들리지는 못했다. 차를 타려고 빵집 바로 앞에 서있었던 적도 여러 번인데 말이야. 왜 그랬는지, 그 문을 열고 들어가는 게 쉽지가 않더라.

그렇게 또 다시 긴 시간이 흐르고, 이젠 그날의 우연한 만남 또한 아득한 기억 속으로 묻혀버렸구나. 지난 설에 내려갔을 때 보니 조금 떨어진 곳으로 가게 자리를 옮겼던데, 지금도 그 빵집 주인이 너일까? 궁금하다.

너와의 만남들을 돌아보면, 추억이라는 게 시냇물 위에 드문드문 놓인 징검다리 같단 생각이 든다. 우리가 또 우연히 내딛게 될 징검돌이 하나쯤은 더 남아 있을까? 빵보다는 빵 굽는 향기가 더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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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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