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는 한가지 비밀이 있다. 고백컨대 얼마 전부터 나의 뇌는 세포 융합을 하기 시작했다. 중요한 사실은 그러한 현상이 세포들의 자발적인 변화,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돌연변이에 기인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언제부턴가 나는 자율신경계를 통제하는 능력을 터득하게 되었고, 세포들은 내가 내린 명령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

물론 믿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내 정신 상태가 정상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이다. 당연하다. 무심코 내뱉은 말이 별안간 사실로 나타날 때 한동안 실감하기 어려운 것처럼, 솔직히 나 스스로도 그랬다. 이해될 수 없는 것은 때때로 비정상적인 것으로 간주된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내가 비밀이라고 말한 것은 바로 그 때문이다.

자율신경계를 통제하기 위한 훈련은 처음엔 억제성 시냅스(inhibitory synapse)를 활성화시키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오감을 통해 발생된 흥분 상태가 뇌에 전달되지 않도록 차단하는 연습을 한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단지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 짧지 않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 결과 나의 뇌가 자극의 진공 속에 놓여졌을 때, 마침내 내가 뇌에게 지시한 것은 단 한 번의 명령이었다. 망각하라!

나는 세포의 자살 프로그램인 아폽토시스(apoptosis)를 응용하였다. 내가 내린 명령은 세포 표면의 Fas/APO1 수용체와 결합하여 캐스페이즈(caspase) 효소를 활성화시킨다. 캐스페이즈는 구조단백질을 분해하여 세포를 죽음으로 이끄는 집행자이다. 캐스페이즈는 예전엔 야마(yama)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이 말은 산스크리트어로 죽음의 신이라는 뜻이다. 망각이란 곧 기억의 죽음이다.

뇌에서 시작되어 다시 뇌로 전달된 이 재귀적인 명령은 좌뇌와 우뇌 사이에서 마치 마주 놓인 두 개의 거울에 비친 영상처럼 스스로를 복제하며 무한히 반복된다. 그 순간부터 뇌 속의 세포들은 아주 바쁘게 움직였고, 캐스페이즈의 연쇄작용에 의해 융합이 시작되었으며, 그에 따라 나의 뇌세포 수도 점차 감소되기 시작했다.

약 150억 개의 신경세포가 인간의 정신작용에 관여한다. 당연히 나의 궁극적인 목표는 이 세포들을 모두 융합하여 하나의 거대한 세포로 진화 시키는 것이다. 진화라는 것이 반드시 단세포에서 다세포로의 분화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고정 관념이다. 이 세상에 만나고 헤어지고 합치고 나뉘어지는 일이 다반사로 일어나는 것처럼, 분열이냐 융합이냐는 필요에 따른 선택의 문제일 뿐이다.

인간이 갖는 수많은 고통은 인간의 뇌가 너무나 정교하게 분화되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것들이다. 나는 이제 단세포가 됨으로써 그런 고통으로부터 해방되고 온갖 소모적인 정신활동을 극소화 하려는 것이다. 해방의 징후는벌써 여기저기서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읽고 쓰고 생각하는 능력이 현저하게 무디어지고 있음을 나는 안다. 먼저 나의 뇌 속에서 사랑, 이별, 상처, 아픔, 증오, 미련, 고독, 우울, 집착 따위의 감정 소모적인 단어들과, 그 단어들로부터 연상되는 어떤 영상들과, 그것들을 무작위로 불러내거나 연결시키는 규칙들이 제거될 것이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오랫동안 그림자처럼 떨어지지 않던 어떤 꿈에 관한 기억들도 서서히 지워질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덩어리로 정제된 무형, 무색, 무취의 순수한 사고만이 남게 될 것이다.

저녁 노을을 보며 혹은 창 밖으로 흘러내리는 빗물을 보며 끝없이 상념에 잠기곤 하는 일도 점차 드문드문해지다 사라질 것이다. 언젠가 걸었던 낙엽 지는 길을 혼자서 걷고 있을 때에도 가을은 쓸쓸하지 않을 것이다. 어느 길 위에서든 나는 더 이상 아무것도 그리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내가 맨 처음의 나, 그 시원의 시간으로 돌아가 완전한 단세포로 다시 태어나는 그날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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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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