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걷기

산, 길 2006. 3. 1. 01:39

1.

아무런 자극 없는 일상이 도도하게 흘러가고 있다. 이제는 그 지루함에 아주 익숙해져서 지루하지 않으면 오히려 불안해지는 지경이 되고 말았다. 종잇장을 사이에 두고 자석에 들러붙은 쇳가루처럼 납작 엎드린 채로 일상의 자력을 따라 이리저리 쓸려 다니고 있을 뿐이다.

2.

남산은 일상의 공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다. 해발 고도는 262미터이지만 심리적인 높이는 그에 못 미친다. 작정하고 나서기보다는 그저 산책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이 더 어울린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남산은 지리적인 위치뿐만 아니라 심리적인 위치까지도 일상에 가깝다.

어느 방향에서 올라도 길어야 40~50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는데, 장충단공원에서 출발하면 정상의 팔각정까지 대략 4,000걸음쯤 된다. 길이 ‘너무나 잘’ 만들어져 있어서 날씨가 덥지만 않다면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오를 수도 있다. 그래도 걷고 싶지 않다면 팔각정 바로 아래까지 운행하는 버스를 타면 된다. 버스보다 조금 더 기분을 내는 방법으로는 케이블카가 있다.

3.

팔각정에서 산성길을 따라 식물원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작은 전망대가 나온다. 그곳에 서면 누구든 공기가 투명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때 공기의 역할은 시간이 기억에 대해 하는 일과 비슷하다. 둘 다 먼 곳과 덜 먼 곳을 나눈다.

4.

수첩을 꺼내려고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는데, 맨 처음엔 지갑이 나오고 다음엔 통장이 나왔다. 내가 꺼내려고 한 게 무엇이었는지 한순간 생각이 안 났다. 세 번째로 수첩이 나오긴 했지만, 이번엔 내가 왜 수첩을 꺼내려고 했었는지 그 이유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고작 몇 초에 불과한 사이에 망각과 기억 사이에서 뇌파가 요동을 쳤다. 그러니 지나온 긴 세월에 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나는 수첩에 이렇게 적었다. 돌아보면 생각나는 것보다 생각나지 않는 것들이 더 많다는 건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게다가 예전보다 시력도 많이 나빠진 게 분명하다. 이제는 눈을 감아도 네가 잘 보이지 않는다.

5.

백범광장에서 회현동으로 내려서면 맨 먼저 회현동'시범'아파트와 마주치게 된다. 예전엔 어땠을지 몰라도 지금은 남산의 가파른 비탈을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처럼애처로워 보인다.

올라가는 사람도 내려가는 사람도 없는 낡은 계단 위에 한참을 서있자니, 아주 잠깐 동안이었지만,마치 펜로즈Penrose의 계단을 밟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낡고 누추한 일상의 끝없는 반복, 그리고 무덤 속 같은 안온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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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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