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토요일, 나는 신탄리행 기차를 탔었다. 신탄리행 기차는 매시 20분에 의정부역에서 떠난다.
의정부를 출발해서 주내, 덕정, 동두천을 거쳐 동안, 소요산, 초성리를 차례로 지나면 38선 표지석이 나오고 그 다음은 한탄강이다.
강변에 있는 역 하면 먼저 섬진강변의 압록역이 떠오르고 다음은 북한강변의 강촌역이 생각난다 . 기차와 강, 길을 따라 흘러가는 것들끼리 제법 잘 어울리는 조합이다.
한탄강 다음에는 전곡, 연천, 신망리, 대광리가 차례로 이어지고, 이렇게 열한 개의 역을 지나고 나면 열 두 번째 역이자 철도중단역이고 동시에 우리나라의 최북단역인 신탄리역에 도착한다. 1시간 20분 정도가 걸린다.
간이역에 내리면 그곳이 아무리 낯설어도 왠지 편안해진다. 화려하지 않고 복잡하지도 않은 간이역은 화장기 없이 소박한 여자의 얼굴 같기도 하고, 이십년 만에 만난 소꿉동무 같기도 하다.
신탄리 역을 나와 철길을 건너 10분쯤 걸어가면 고대산 입구가 나온다. 오늘의 최종 목적지다. 철길 따라 코스모스가 피어있다. 생각해보니 코스모스의 향기를 맡아본 적은 없다. 맡지 않아도 거기서는 언제나 가을이 묻어났으므로.
고대산은 해발 832미터다. 고대산과 휴전선 사이에 그보다 높은 산은 없다. 고대산에 오르면 시원하게 펼쳐진 철원 평야가 한눈에 들어온다. 지난 토요일은 일기가 몹시 흐려 먼 곳은 죄다 그림자만 남아 있었다. 그 그림자 속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있고 갈 수 없는 땅이 있다.
정상에 오르는 길은 세 길이 있다. 나는 그 중 가장 짧은 길로 오르고 가장 긴 길로 내려왔다. 산에서 가장 짧은 길이란 대개 가장 가파른 길을 뜻한다. 뜨겁게 짧든 미지근하게 길든, 어느 길을 택하든 그 나름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이다. 선택은 취향대로 혹은 발길 가는대로.
정상에서 30분 남짓 못 미쳐 칼바위를 만난다. 칼바위 끝에 오르면 제법 아찔한 절벽이다. 그 절벽에 서자 저 아래 아득한 골짜기로 나를 날려버릴 것처럼 거친 바람이 불었다. 그때 당신이 부르기만 하면 까마득한 낭떠러지 위에서 나는 처음 꽃 피어날 것 같았습니다 아침에 집을 나서며 나는 책꽂이에서 시집 한 권을 뽑아 들었는데, 그 시집에 실린 시의 한 구절이다. 시집의 제목은 <그 여름의 끝>이고 쓴 사람은 이성복이다.
신탄리에서 의정부 가는 기차는 매시 정각에 떠난다. 기차를 기다리며 <그 여름의 끝>을 마저 읽었다. 잠자리 한 마리가 철로 위를 빙빙 돌다가 멀리 날아갔다. 여름이 끝나 가고 있었다. 참으로 무더웠던 여름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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