Zoon In & Out

칼라비야우공간 2004. 12. 13. 21:48

내가 있는 곳은 이 건물의 17층이다. 앉은 자리에서 시선을 전방으로 향하면 화분 몇 개가 놓인 커다란 통 유리창이 있고, 유리창을 넘어가면광장아파트다. 아파트 단지 외곽은 윤중로이고, 그너머는 샛강이다.

샛강에는 생태공원이 있고, 강이라고 하기엔 좁은 물길이 하나 흘러간다. 그 물길과 나란히 올림픽도로가 지나가고, 올림픽도로를 건너 뛰면 5호선 전철과 국철이 교차하는 신길역이다.

원래 영등포역과 대방역 사이에는 전철역이 없었다. 국철 신길역은 국철과 지하철 5호선의 이종교배에 의해 태어났다. 서로 다른 노선의 사람들이 전철을 갈아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탄생 배경이었으므로, 맨 처음 역이 생겼을 때는 입구도 출구도 없었다.

신길역 너머로 허름한 느낌의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거기가 바로 영등포동이다. 낡은사진 같은 동네가 꽤 넓게 이어진다. 그 뒤로 멀리 멋도 맛도 없는 배경처럼 고층의 아파트들이 서있는데, 거기가 아마 몇 년 전부터 공장이며 낡은 집들을 밀어내고 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한 신도림일 것이다.

신도림의 아파트들은 재개발된 그들의 꿈만큼이나 높아서, 그 뒤에 이어지는 구로동이나 철산동은 거기 가려져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다만 멀리 산자락이 하나 어스름하게 보인다. 산 이름이 무엇일까.

지도를 펼친다. 그리고 내가 있는 곳에서 대략 남쪽으로 방향을 잡아 직선을 긋는다. 직선과 산의 등고선이 교차하는 부근에 도덕산이라고 적혀 있다. 그 산의 능선을 경계로 거기서부터 하늘이 시작된다.

하지만 이곳에서 도덕산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이는 날은 그리 많지 않다. 대개는 스모그 때문이고, 가끔은 안개나 구름 때문이다. 그리고 또 아주 가끔은, 창가의 저 화초들처럼 조금씩 시들어가는 내 우울한 영혼 때문이기도 하다.

창 너머로 어디론가 날아가는 한 무리의 새들이 보인다. 비둘기는 아니다. 요즘의 비둘기는 저렇게 높이 날지 않는다. 도시의 비둘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짧은 거리를 낮게 나는 법을 배운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데는 그것이 훨씬 더 효과적이므로. 어쩌면먼 훗날 언젠가 비둘기는 더 이상날지 못하는 새의 목록에 올려져 있을지도모른다.

그 중 한 마리가 무리에서 벗어나추락하듯 떨어진다. 그리고는마치 시비를 걸기라도 하는 것처럼 내 시선에 와서부딪친다. 팽팽하게 늘어났던 줄의 마디가 한순간 툭 끊어진다. 막 도덕산을 넘어 보이지 않는 곳으로 나가려던 시선이 순식간에 제자리로 튕겨지고 만다.

도덕산에서 신도림을 지나, 영등포로, 다시 신길역으로, 올림픽도로와 샛강을 건너, 유리창을 꿰뚫듯 관통하여 마침내 내 망막에 이르기까지, 한번의 숨을 미처 다 쉬기도 전에 상황은 종료된다. 그리고 잠시 후 누군가 창문에 커튼을 친다. 커튼 콜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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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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