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장, H에게
이름 앞뒤로 수식어가 몇 개씩 붙는 걸 보니, 나도 꽤 오래 살았음이 틀림없다. 안 본 사이에 나는 흰 머리카락이 제법 늘었고, 요즘엔 턱수염에서도 흰 놈이 드물지 않게 보인다. 흰색은 말하자면 시간의 색이다. 한번은 코털에서도 발견을 했는데, 아마 왼쪽 콧구멍 속이었지. 그런데 그걸 뽑자 신기하게도 왼쪽 눈에서만 눈물이 났다. 왼쪽 콧구멍과 왼쪽 눈은 모르긴 몰라도 모종의 비밀스러운 관계가 있음이 분명하다.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자주 우리 자신이 원인을 기다리고 있는 결과들이라는 인상을 준다. 다음은 1640년 데후에서 투가람이 깨달은 말이다. 나는 멀리서 왔노라. 나는 끔찍한 고통들로 인해 괴로움을 겪었건만, 나의 과거가 아직도 내게 무엇을 예비하고 있는지 나는 모르고 있도다!* 내 안에 있는 것조차 미처 알지 못하는 내가, 삶이 숨겨놓고 보여주지 않는 무엇을 찾아 여태 헤매고 있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비밀이란 모름지기 눈에 보이지 않게 숨겨져 있어야 비밀다운 것이므로.다만 그 순간, 슬프지도 뜨겁지도 않은 눈물을 줄줄 흘리고 있는 모양이 꼭어설픈 희극배우 같다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그밖에도 이마에는 제법 형태가 잡힌 주름살이 세 개 생겼고, 거울에 비친 얼굴색을 보면 푸석푸석한 게 전체적으로 별로 맛이 없어 보인다. 때깔 좋은 시절은 다 지나간 것이다. 내가 봐도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지는데, 너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한 것이야 당연하겠지. * 파스칼 키냐르「은밀한 생」에서 인용 데후Dehou : 인도의 Deccan 지방에 있는 Sahyadri 산맥 기슭의 마을 투가람Toukaram(1598 ~ 1650) :인도 출생의 순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