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무의도 행

추락주의 2005. 4. 18. 01:35

1. 무의도 행

 

지난 밤부터 시작된 치통을 빼면 흠잡을 것 별로 없는 봄날 아침이다.오늘 목적지는 무의도. 치통과 함께 신도림에서 인천행 전철로 갈아탄다.

 

 

2. 치통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니가 한 개만 난 줄 알고 있었다. 좌측 위, 정상적인 어금니 크기의 절반도 안 되는 그 놈은 날 때부터 나를 괴롭히더니 지금도 수시로 말썽을 부려서 자신의 존재를 상기시킨다. 이럴 땐 그냥 뽑아버려도 아프기보단 그저 시원하기만 할 것 같다. 하지만 통증이 있는 상태에서는 치과에 가도 뽑아주지 않는다. 여기에는 이런 뜻이 담겨 있다. 고통의 순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스스로 그 고통을 견뎌내는 것이다. 일단 시작된 고통은 피할 방법이 없다.

 

영화 캐스트어웨이를 보면 무인도에 표류한 주인공이 치통을 해결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가 어떻게 했는지 기억하고 싶지 않다. 설령 기억이 난다 해도 그 방법을 써먹고 싶은 생각은 없으므로.

 

 

3. 무의도에 가려는 이들을 위한 간략한 정보

 

인천 행 전철을 타고 가다 동인천역에서 내린 다음, 지하도에서 대한 서림 방향으로 나간다. 맥도널드 앞 버스 정류장에서 12번 또는 24번 버스를 타면 약 20 후에 연안여객터미널에 도착한다. 무의도 가는 배는 아침 9시 반에 출발하고, 하루에 단 한번뿐이다. 이 배는 무의도 샘꾸미 선착장을 거쳐 덕적도까지 간다. 나오는 배는 오후 5시에 있다. 샘꾸미까지 물길로 약 25분이 걸린다.

 

물론 무의도에 가는 방법이 이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걷는 것을 별로 즐기지 않는다면 잠진도까지 차를 타고 가면 된다. 잠진도는 영종도와 무의도 사이에 징검다리처럼 놓인 작은 섬이다. 잠진도에서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바다를 건널 수 있다. 5분이면 무의도의 큰무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4. 호룡곡산

 

샘꾸미 선착장을 나와 마을로 들어서면 호룡곡산을 오르는 등산로가 시작된다. 해발 245미터. 동네 뒷산 오르는 기분으로 오르면 된다. 대부분의 동네 뒷산에서는 바다가 보이지 않겠지만 여기서는 멋진 바다가 보인다. 좋은 것은 나누면 배가 된다지만 섬에서는 혼자가 돼보는것도 나쁘지 않다.

 

 

5. 소무의도 혹은 떼무리

 

샘꾸미 선착장 바로 앞에는 소무의도가 떠있다. 산을 오르다 적당히 숨이 차오를 때쯤 뒤를 돌아보면 마치 한입 배인 사과 모양의 소무의도가 눈에 들어온다. 소무의도는 예전엔 떼무리라고 불렀다. 사과의 싹둑 물려나간 자리에 선착장이 있고 그 주변에 집들이 모여있는데, 말하자면 사람들이 섬을 먹고 사는 형세다.

 

 

호룡곡산을 오르다 돌아본 소무의도(사진 : 한국의 산하)

 

 

6. 구름다리

 

대략 한 시간쯤 걸으면 호룡곡산을 넘을 수 있다. 산을 거의 다 내려오면 무의도의 허리를 가로지르는 포장도로가 나오고 도로 위로 아치형의 작은 철제 다리가 놓여 있다. 안내도에는 구름다리라고 되어 있지만 다리 위에서 내려다볼 만한 것은 가끔 지나다니는 자동차밖에 없다.

 

이 구름다리는 남쪽의 호룡곡산과 북쪽의 국사봉 사이에 마치 두 산을 저울질 하듯 걸쳐있는데, 도로로 인해 잘려나간 산짐승들의 길을 대신한다고 한다. 과연 그런 뜻이 동물들에게도 잘 홍보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어쨌거나 아주 효과가 없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내가 그 다리를 건넌 전후로 나를 포함해 두 발로 걷는 여러 동물들이 그 다리를 건넜다.

 

 

7. 망각

 

문득 치통을 느끼지 못하고 있음을 깨닫는다. 통증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어느 순간부턴가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럴 수도 있나? 그럴 수도 있다.

 

 

8. 실미도

 

사봉 위에서 북서쪽으로 내려다보이는 실미도는 가느다란 눈썹 모양이다. 뭔가 비밀스러운 역사를 감추고 있기엔 섬이 너무 작아 보인다. 한쪽 끝에 삐죽하게 튀어나온 모래톱이 마치 손을 내밀 듯 무의도 쪽을 향하고 있다. 오래 전에 그 섬에 갇혔던 어떤 사내들도 세상을 향해 그렇게 손을 내밀었던 적이 있었을 것이다. 물이 빠지고 나면 저곳으로 그 사내들에겐 열리지 않았던 바닷길이 열린다. 실미도(가 보이는) 해변을 걷기 위해서는 2,000원을 내야 한다.

 

 

9. 큰무리

 

실미에서 큰무리 가는 마을 버스는 전화를 하면 온다. 버스 정류장엔 전화번호가 적혀 있다. 하지만 나는 그냥 걷기로 한다. 얼추 30분 정도면 더 걷고 싶어도 길이 끊길 것이다. 이순이 넘은 나이에 실크로드를 걸어서 지나간 프랑스인 베르나르 올리비에의 여행기를 떠올린다. 베르나르가 아나톨리아의 건조한 길을 걷고 있을 때면 지나가는 자동차들이 그를 태워주기 위해 기꺼이 멈춰 서곤 했으므로, 덕분에 그는 운전자들의 친절한 제의를 거절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다. 큰무리까지 걷는 동안 혹시 그런 차가 내 옆으로 지나가지 않을까 하는 염려는, 결론만 말하자면 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10. 다시 치통

 

큰무리에서 잠진도 가는 배에 오른다. 이 주변은 영종도 국제공항을 만들기 위해 섬과 섬 사이가 메꿔지면서 육지에 붙들린 작은 섬들의 무덤이 되었다.

짧은 기적 소리 한번. 엔진 소리가 커진다. 무룡 1호, 떠날 준비 완료. 수면에서 놀던 갈매기들이 고물 주변으로 일제히 날아오른다. 갈매기들도 준비 완료. 그리고 다시 치통이 시작된다. 이걸 뽑아? 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