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주의 2005. 6. 16. 22:28

1.

내가 사용하고 있는 자판은 몹시 낡았다. 모델명 LKB-0107인 이자판은 1997년 12월에 태어났고, 그로부터 얼마 후 내게로 왔다. 나와 더불어 동고동락한 세월이 어림잡아 8년 가까이나 된다.

처음 자판이 내게로 왔을 땐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겉으로 보기엔 멀쩡해 보이지만, 자판은 이미 몇 개의 글쇠가 망가진 상태다. 특히 왼쪽 Shift와 오른쪽 Enter는 상태가 심각하다. 한번 눌려지면 복원되지 않기가 십상이라, 마치 자폐증에 걸리기라도 한 것처럼 같은 동작을 한없이 되풀이하곤 하는 것이다.

자판과 짝을 이뤘던 스킨은 상태가 더욱 심각하다. 스킨으로서의 생명은 이미 오래 전에 끝났다. 너무 많이닳아 구멍투성이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인정 많은 주인을 만난 덕분에 지금은 은퇴를 해서 자판 근처에서 한가로운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 동안 새 자판을 사용할 기회는 여러 번 있었지만 바꾸지 않았다. 왜 그랬느냐고 묻는다면 특별히 내놓을 대답은 없다. 단지 내 손때가 묻었고, 손에 익었고, 나로 인하여 낡아지고 망가졌으니까. 그저 버리지 않는 것 말고는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으니까. 나 역시 제법 낡은 축에 속하는 나이가 되면서, 뭐랄까, 일종의 동지의식 같은 게 생겼는지도 모른다.

2.

구조 조정의 바람이 한 차례 휘몰아치고 지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무기력하게회사를 떠나야만 했다. 그 중의 몇몇은터져나오는 분노와 회한을 미처 삭이지 못하고 토해내기도 했지만, 그러나 강물에 던져진 작은 돌멩이가 파문을 남기면 얼마나 남겼겠는가. 있었던 자리에서 그들이 지워지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것이다

비정하지만 누구를탓할 수는 없다. 만약 떠나간 자와 남은 자의 역할이 바뀌었다 해도 마찬가지였을 테니. 단지 이 세상의 구조가 그렇게 되어 있을 뿐인 것이다.

갈 사람은 가고 올 사람은 와서 이곳에는 다시 새로운 일상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번에 살아남아 다른 이들의 장례식을 치른 사람들도 언젠가는 반드시 자기 자신의 장례식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