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비야우공간

하늘정원

추락주의 2005. 10. 28. 00:38

오전 일과가 절반쯤 지나고 있을 즈음이었다. 커피를 마시려고 음수대로 향하는 순간 카펫 위를 지나가는 어떤 작고 특이한 움직임이 내 감각기관에 포착되었다. 그것은 한 점에서 다른 점까지 불연속적으로, 그러니까 두 점 사이를 마치 순간 이동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때 안경을 벗고 있었으므로, 그 신기한 움직임의 실체를 좀 더 가까운 곳에서 확인하기 위해 허리를 구부렸다. 그것은 바로 윤기가 흐르는 갈색의 작은 몸체에 탄탄해보이는 역 V자 뒷다리를 가진 귀뚜라미였다.

귀뚜라미를 본 순간 돌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등장하는 토끼가 연상되었던 까닭은, 아마도 귀뚜라미를 발견한 장소가 사무실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식물성이라고는 듬성듬성 놓여진 몇 개의 난초 화분 따위가 전부인 사무실은 결코 귀뚜라미가 살 만한 환경이 아니었으므로, 카펫 위를 뛰어가는 귀뚜라미가 마치 시계를 보며 말을 하는 토끼처럼 생뚱맞게 느껴졌던 것이다. 귀뚜라미는 정말로 토끼처럼 껑충껑충 뛰면서 하늘 정원쪽으로 가고 있었다.

하늘 정원은 이 건물에서 유일하게 바깥으로 노출된 테라스에 내가 붙인 이름이다. 그곳에는 나무가 있고, 꽃이 있고, 화단 한쪽 귀퉁이에 누군가 고추도 심어놓았다.

하늘 정원으로 가기 위해서는 사무실의 양쪽 끝에 있는 문을 이용해야 하지만, 귀뚜라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통 유리로 된 벽을 향해 뛰어가고 있었다. 어쩌면 내가 모르는 비밀스러운 통로를 귀뚜라미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나다를까 귀뚜라미는 잠시 후 책상 밑으로 들어가더니 이윽고 감쪽같이 사라져서 내 추측에 무게를 실어주었다.

하늘정원에서 도시의 스카이라인 너머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은 꽤나 비장미가 있다. 오늘도 노을을 보려고 기다렸으나 나흘째 허탕을 쳤을 뿐이다. 해는 날마다 뜨고 지지만 언제나 붉은 노을을 남기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노을을 만나기가 얼마나 어려운 것인지 기다려본 사람은 안다. 노을을 기다리다 그대로 어두워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