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방태산, 겨울 끝에서

추락주의 2012. 2. 29. 22:09

2월 11일, 방태산 휴양림에서 출발해서 매봉령, 구룡덕봉 지나 주억봉에 오른 다음 지당골을 거쳐 다시 출발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대략 다섯 시간 반쯤 걸렸는데 버스 시간에 맞출 일만 아니었으면 훨씬 더 느리게 걸었을 것이다.


깊은 곳은 눈이 허리 높이까지 쌓여 있어서 눈 실컷 보고 밟고 빠지고 미끄럼도 타고 그러다가 뜻하지 않게 뒹굴기도 하며 별로 지루할 틈이 없었는데, 그리고 동행 없이 걷는 게 처음도 아니었는데, 그런데 이상하게 내내 좀 심심했다.


그날 이후로 마치 겨울이 다 가버린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긴 능선의 끝자락에서 종일 걸어온 길을 돌아볼 때처럼, 결국 다 와버렸구나 하는, 그런 비슷한 느낌 말이다. 얼마나 오래되어야 거기에 추억이라고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내 사진기는 원래부터 그다지 우수한 성능은 아니었지만 작년 여름 계곡물에 한번 입수한 뒤로는 렌즈 상태가 더 나빠져서 특히 먼 곳을 당겨 찍을 때 선명도가 급격히 떨어진다. 언제부턴가 내 시력에도 비슷한 문제가 생겨서 안경 도수를 먼 것에 맞추면 가까운 것이 불편해지고 가까운 것에 맞추면 먼 것을 보기가 불편해졌다.


가까운 것을 택할 것이냐 먼 것을 택할 것이냐 하는 딜레마 앞에서 잠정적으로 나는 먼 것을 포기했다. 그것은 그저 생물학적 기능의 쇠퇴에 대처하기 위한 하나의 단순한 선택일 뿐이었음에도 마치 내가 삶을 바라보는 방식에 대한 환유처럼 읽혀질 때가 있다.


구룡덕봉에서 지나온 길을 돌아본다. 뼈만 남은 짐승의 화석 같기도 하고 엎드린 호랑이 몸통 같기도 하다. 산줄기가 마치 처음 시작했던 곳으로 흘러 들어가는 것처럼도 보였다.


설악산 방향으로는 겹겹의 능파綾波가 펼쳐지는데, 가장 먼 곳에는 설악의 귀떼기청과 대청이 그리고 그 사이에 점봉산이 머리에 흰 눈을 이고 있다.멀거나 가깝거나 상관없이 있는 그대로를 드러내는 날것의 위용 앞에서 나는 조그맣게 움츠러든다.


지당골로 하산하는 길에 꽤 큰 나무가 뿌리째 뽑혀 쓰러져 있다. 뽑혀진 부분이 세워졌던 부분에 비해 너무 빈약해 보인다. 겉으로 드러난 높이가 삶을 지탱하는 힘이 아니라는 것을 쓰러진 뒤에야 알았겠지, 아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