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도시 산책, 서울숲 남산길

추락주의 2012. 3. 25. 18:29


국립극장에서 성곽길을 따라 올라 봉수대가 있는 남산 정상에 도착했을 때 윤곽도 선명한 붉은 해가 한강 건너 먼 곳에서 기울고 있었다. 저녁 노을을 사진 속에 담고 싶어서 핸드폰을 꺼냈는데 배터리 부족으로 카메라 기능이 실행되지 않았다. 전원을 끄고 예비 배터리를 찾아 교체하고 다시 켜는 사이에 해는 거의 산 능선에 닿게 내려왔다. 서두르느라 핸드폰 rebooting이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카메라를 작동시켰더니 한참을 조작불능 상태로 멈춰 있다가 결국 프로그램 오류가 발생했다. 그러는 동안 해는 이미 반 이상 산 너머로 내려갔다. 어두워지면서 기온도 많이 떨어져 손가락이 곱아 조작도 더디었고 찬 바람을 맞고 있노라니 눈물에 콧물에 급한 마음까지 동시에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둘이 아니었다. 포기하려는 순간 마침내 카메라가 켜졌고 산 너머로 사라지기 직전의 해를 가까스로 사진에 담을 수 있었는데, 찍고 보니 고작 이 흐릿한 사진 하나를 얻기 위해 아까운 순간을 허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다 부질없는 욕심인 것이다.


오늘 걸었던 길은 ‘서울숲남산길’로 명명된 길인데 이름 그대로 뚝섬의 서울숲에서 남산까지 연결된다. 오후에 한차례 눈을 뿌렸던 구름이 걷히고 해가 나긴 했지만 여전히 쌀쌀했고 무엇보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걷기에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점퍼 지퍼를 목까지 올리고 두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는 약간 숙인 상태로 바람 속을 걸었는데, 사실 몸 상태도 썩 좋지가 않아서, 뭐랄까, 찬 바람이 옷 속을 파고들 때마다 살갗의 세포들이 분해되어 깎여나가는 느낌이었다. 서울숲과 남산 사이는 몇 개의 야트막한 산이 징검다리처럼 연결되는데, 해발고도 100미터도 되지 않는 응봉산에서부터 오르락내리락 조금씩 고도를 높여가며 대현산, 금호산, 매봉산을 차례로 지난다. 그래서 일명 ‘도심등산로’라고도 하는 모양인데, 대부분 거의 산 정상까지 포장된 도로가 지나가고 건물들이 올라와 있어 ‘등산로’라는 표현은 많이 민망하다. 그래도 산의 흔적들이 조금씩 남아 있기도 하고, 매봉산 정상 정자에서 내려다본 한강 조망은 기대 이상으로 시원했다.


2012년 3월 2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