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비야우공간

오후 8시, 체증

추락주의 2004. 4. 8. 23:18

창 밖을 내려다 보니 길이 온통 새빨갛다. 도로가 마치 심한 변비를 앓고 있는 대장 같다.

대장은 맹장과 결장과 직장으로 나뉘어진다. 맹장에 이어지는 결장은 그 진행방향에 따라 상행, 횡행, 하행 그리고 S상 결장으로 구분되고, 그 다음이 직장이다. 직장의 끝은 항문이다.

생각해보니 여기서 집까지 가는 길이 얼추 그런 모양이다. 그렇게 치면 지금 내가 있는 여기가 맹장쯤 되는 셈이다.

맹장의 안쪽 뒷벽에는 충양돌기가 있다. 보통은 충수라 하고 우리가 흔히 맹장염으로 알고 있는, 충수염을 일으킬 때 말고는 대개의 경우 우리의 관심 밖에 있는, 별 쓸모가 없는 기관이다. 말하자면 충수는 우리 몸에 숨겨진 일종의 함정이다.

문득 고개를 돌려 뒤통수 쪽을 살펴본다. 거기가 충수인가? 뭐가 있긴 있는가? 이미 함정에 빠져버렸는가? 벗어날 수 있는가?

나는 지금 맹장 바깥이 비치는 창문으로 상행 결장과 횡행 결장 사이의 만만치 않은 동태를 살피고 있다. 일과로부터, 안전하게, 배설되기를 기다리는 시간. 저 꽉 막힌 변비는 언제쯤 뚫리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