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백두산 서파 트래킹

추락주의 2010. 8. 31. 00:50

8월 16일 이른 아침 송강하를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은 파랗고 햇빛은 눈이 부셨는데 서파 산문을 지나면서 점점 구름이 많아지더니 5호경계비 오르는 주차장에 도착했을 땐, 1,236계단 중 구름 아래로 드러난 것은 겨우 100여개 남짓, 그리고 마중나온 맵찬 바람

무슨 까닭인지 멀쩡한 돌계단 옆에 나무 계단을 새로 놓고 있다. 새로 놓는 계단 수는 몇 개가 될까?

주차장의 고도가 이미 해발 2,200m를 넘는다고 한다. 아주 오래 전 Billings에서 Yellowstone 가는 길에 넘어 갔던 Beartooth Pass, 우리말로 하면 웅치령쯤 되는 그 고개가 해발 10,947ft, 미터로 환산하면 약 3,336m 였다. 그때 이후로 두번째 높은 땅에 발을 내딛었다.

5호경계비에 도착했으나 역시 예상했던 대로 천지는 보이지 않는다. 비가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

5호경계비 주변을 안개처럼 잠시 서성거리다, 어렵게 왔으니 기필코 봐야 한다는 욕심 같은 것, 버리기로 한다.

백두산에는 해발 2,500m를 넘는 봉우리가 모두 열여섯 개 있고, 이름을 가진 봉우리도 그것들 뿐이라 한다. 서파 트래킹 구간은 그 중 다섯 개를 지나가는데 이름 있는 봉우리나 이름 없는 봉우리나 어느 것 하나 이름표를 달고 있는 봉우리는 없다.

한허계곡, 청석봉과 백운봉 사이의 절벽을 피해 우회하는 길, 한참을 내려갔다가 다시 한참을 올라가야 하지만, 땀 흘린 것이 아깝지 않은 풍경을 선물로 받게 된다. 겻들여 천지에서 흘러내리는 물로 목을 축일 수도 있다.

한허계곡에서 백운봉까지 가파른 오르막길은 서파 구간 중에서 가장 힘든 길이기도 하지만 그냥 두고 가기에 아쉬워서 자꾸만 뒤돌아보게 되는 길이다.

그래, 그럴 땐 잠시 쉬었다 가자.

그리고 길은 다시 구름 속으로 이어진다. 백운봉 지나 저 앞이 녹명봉인가? 어디가 어딘지 분명치는 않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겠다 싶던 그 순간……

마치 꿈을 꾸는 것처럼 안개의 섶을 헤치고 천지가 속살을 드러낸다.

욕심을 버렸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

보지 않았으면 그립지도 않았을 텐데

아마 두고두고 그리울 것 같다.

그 길 위에 함께 있던 오늘의 너희들도.

내려가는 길은 휴식처럼 포근하다.

천문봉과 용문봉 사이, 달문 가는 길은, 오늘, 막혔다 한다.

천지에 손을 적시진 못했지만, 그래도 아쉬움은 없다.

다시 올 이유를 하나쯤 남겨두는 것도 그리움을 달래는 방법이 될 테니까.

그 날에도 우리 함께 걸을 수 있으면 좋겠다.

저 아래, 총 15km 서파 트래킹의 종착점이 보인다. 오늘은 저기에서 멈추지만, 그러나 거기가 길의 끝은 아니다.

흘러가기만 한다면, 길은 계속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