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비야우공간

원시인 이야기

추락주의 2004. 4. 14. 21:13

언젠가 몇몇 고향 친구들을 만났을 때다. 오랜만에 모여 서로 안부도 묻고, 오지 않은 친구들 소식도 전하며, 주거니 받거니 술을 마셨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나만 빼고 모두 제각기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 중 누군가 통화를 끝내주기를 기다리며 혼자 홀짝홀짝 술잔을 비우고 있자니, 시쳇말로 기분이 몹시 뻘쭘했다. 우리는 만났으나 그 순간 각자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그때 마주친 상황이 현실적으로 아주 드문 경우였을까? 그렇지만은 않을 것 같다. 핸드폰이 필수품이 된 요즈음의 문화에서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풍경일 거란 생각이 든다. 다만 그 순간의 기억이 내게 오래 박혀 있는 것은, 어쩌면 내가 핸드폰을 갖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핸드폰. 이 말은 틀림 없는 콩그리쉬다. 셀(Cell)폰이나 모바일(Mobile)폰이라고 해야 제대로 된 표현이겠지만, 이땅에 사는 많은 사람들이 핸드폰에 익숙하니 그냥 핸드폰이라고 쓴다. 사실 콩그리쉬라는 말부터가 콩그리쉬다.

나는 아직까지 핸드폰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핸드폰뿐만 아니라 삐삐라 불리며 한동안 이동통신의 대표주자로 군림했던 무선호출기조차 가져본 적이 없다.

꽤 오래 전에 원시인이 등장하던 모 이동통신사의 시리즈 광고가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핸드폰 없으면 원시인’이라는 메시지다. 그 광고가 전파를 탔던 때가 아마 1999년 무렵이었는데, 정보통신부에서 펴낸 정보통신백서에 따르면 그 해 이동전화 보급 대수는 약 2,340만대였다.

그 후로도 수치는 꾸준히 증가하여 2002년 말에는 3,250만대가 되었으니, 3년 사이에 거의 1,000만에 육박하는 사람들이 원시인에서 벗어나 문명인의 대열에 합류한 셈이다. 얼마 전 신문에는 마침내 3,400만을 돌파했다는 기사가 실렸다.

숫자가 자꾸 나오면 머리 아픈 사람들도 있겠지만, 한번만 더 통계자료를 인용하자.

통계청 자료를 보면 2002년 말 현재 외국인을 제외한 우리나라의 주민등록인구는 약 4,820만 명이다. 따라서 인구대비 보급률로 계산하면 전국민의 약 68%가 핸드폰을 가지고 있고, 그 중 현실적인 수요 층이라고 생각되는 10세에서 75세 사이의 인구를 기준으로 하면, 실질보급률은 80%에 이를 것으로 추정된다.

핸드폰은 ‘있으면 편리한 물건’에서 ‘필수품’으로 자리 매김을 다시 했다. 그와 동시에 원시인들은, 수치상으로, 이제 거의 멸종 위기에 처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내가 바로 그 중의 한명이다.

요즘은 인터넷 사이트에 회원 가입을 할 때도 핸드폰 번호를 입력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아무 번호나 넣으면 넘어가긴 하지만, ‘핸드폰 없음’이란 항목은 없다. 누구나 당연히 핸드폰을 가지고 있을 거라는 가정 아래서 나는 ‘그들이 미처 예상할 수 없었던’ 특이한 예외에 속하는 것이다.

실제로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핸드폰이 없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거의 못 봤다. 그런 희소성 때문에 나는 핸드폰이 없으면 불편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 사실 가끔 불편할 때가 있긴 하다.

지하 주차장에서 차를 꺼내려다 주차 퍼즐이 작동을 하지 않은 적이 두어 번 있었다. 관리인에게 연락하기 위해 전화가 있는 곳까지 다시 몇 층을 올라가야 했다. 또 약속 시간은 이미 지났는데 꽉 막힌 길 위에서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을 때라든가, 콜 택시를 부르려고 할 때도 핸드폰이 아쉽기는 하다. 받아야 할 전화가 있는데 급하게 자리를 비워야 한다든가, 전화를 해야 하는데 공중전화가 없다든가 하는 경우도 사소하지만 불편함에 속한다. 또 뭐가 있을까. 신용카드사에서 제공하는 무료 SMS 서비스 같은 혜택도 나는 누릴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나는 한번도 그 불편함들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저 감수할 만한 불편일 뿐이다. 정작 불편함을 느끼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주변의 사람들이다. 대개 내가 어디 있는지 파악이 되지 않는 경우다. 그러나 만약 핸드폰이 생긴다고 해도 온전하게 불편함만 사라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틀림없이 어떤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핸드폰은 산에서도 터지고 바다에서도 터지고, 화장실에서 힘주는 순간에도 터진다. 애인을 바래다주는 밤 늦은 골목길에서 막 키스에 성공하려는 순간에도 눈치 없이 터져버린다. 힘들게 용기를 내서 사랑의 고백을 하려는 순간 그 혹은 그녀의 핸드폰이 울리고, 그 혹은 그녀가 아무렇지도 않게 전화를 받는 동안, 겨우 부풀려 놓았던 용기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쭈그러들고 만다. 애인과 데이트 중에 걸려오는 마누라 혹은 남편의 전화는 참으로 얄궂다.

문자 그대로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마구마구 터진다. 피할 틈이 없다. 멀리 여행을 떠날 때조차도 핸드폰은 일상으로부터의 고리들을 끊지 않는다. ‘속세를 떠나 출가한’ 스님들도 핸드폰은 가지고 다닌다. 혼자만의 은밀한 공간은 허용되지 않는다. 만약 핸드폰을 꺼놓기라도 할 경우, 엉뚱한 오해를 살 수도 있다.

빌 공(空) 자를 쓰는 허공은 요즘 시대엔 단지 사전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지 온갖 주파수의 전파들이, 변조된 언어들이, 빽빽하게 날아다니고 있을 것 아닌가. 한마디로 빈틈 없는 세상이다. 도무지 여백이라곤 없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나 정말 여백이 없는 것은 허공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인지도 모른다. 핸드폰이 사람과 사람 사이를 밀착시켜주는 대신에 여백을 지워버리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나는 아직까지 핸드폰을 갖고 싶은 생각이 없다. 불편함에는 조금만 익숙해지면 그만이다. 그냥 이렇게 빈틈 많은 원시인으로 사는 것도 그다지 나쁘지만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