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주의 2004. 5. 21. 00:28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좀처럼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 누구에게나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다. 내게도 그런 기억이 몇 있는데, 오늘 하려는 이야기는 그 중 하나다.

그러나 그 기억의 보존 상태는 온전하지 않다. 단지 몇몇 장면들만 마치 오래 전에 봤던 영화처럼 떠오를 뿐이다. 시간이 갖는 망각의 속성 앞에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때의 기억을 복원하기 위해선 불연속점으로 이어진 장면과 장면 사이로 다시 들어가 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내가 초등학교 일학년이던 여덟 살 때의 일이다. 많은 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시절이었다. 그래도 일주일에 하루는 자유학습의 날이라고 불렸는데, 그것이 언제까지 계속되었는지 자유학습의 날에 주로 무엇을 했었는지 기억 나는 것은 별로 없다. 사실 내가 자유학습의 날에 대해 무언가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지금 이야기하려고 하는 그날 단 하루 뿐이다.

학교 앞에는 작은 산이 있었다. 무등산 자락의 발치쯤 될까? 사람들은 그 산을 조대 뒷산-그 산 아래 조선대학교가 있다-이라고도 불렀고, 또 깃대봉이라고도 했다. 그날의 행선지도 바로 그 산이었다. 우린 병아리 떼처럼 재잘거리며 줄줄이 선생님의 뒤를 따라 산에 올랐다.

기억 속에서 그날 나는 화판을 매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깃대 주위에 올망졸망 앉아 그림을 그렸을 것이다. 그때 내가 무엇을 그렸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굳이 복기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시작부터 지루한 이야기가 될 것이므로.

문제의 그 순간은 산에서의 일정을 다 마치고, 왔을 때처럼 다시 선생님을 따라 줄줄이 학교로 돌아가는 길에 돌연히 찾아왔다.

내려오는 길에는 갈림길이 하나 있었다. 거기서 오른쪽 길로 가면 학교였고, 왼쪽은 조선대학교를 내려다 보며 집 쪽으로 곧장 이어지는 길이었다. 그 갈림길이 보이기 시작할 즈음, 내 안에는 어떤 유혹의 소리가 마치 막 끓기 시작한 주전자 속의 물처럼 보글거리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내 안에서 이렇게 속삭였다.

“저기 갈림길이 보이지? 어느 길로 갈래? 당연히 오른쪽이라고? 왼쪽은 어때? 선택의 여지가 없어? 정말 그럴까?”

그 순간 내가 왜 그런 충동을 느꼈는지 지금 내 기억 속에 남겨진 단서들만으로는 가늠할 수가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그 소리가 사이렌의 속삭임처럼 거부할 수 없는 힘으로 나를 끌어당겼다는 사실이다. 살다 보면 누구에게나 그런 불가항력의 순간은 찾아온다. 그때 나는 왼쪽 길로 가야만 했다.

그날은 틀림없이 자유 학습의 날이었지만, 나는 너무 어려서 자유란 말의 의미를 온전히 알지도 못하였지만, 그래도 두 가지는 분명히 알고 있었다. 자유 학습의 날에 허용된 자유 속에는, 그 상황에서 가고 싶은 길을 내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는 없다는 것이 하나였고, 나머지 하나는 모든 사람을 왼쪽 길로 가도록 설득하는 일도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왼쪽 길로 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한가지,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갈림길에 이르렀을 때 난 정말로 그렇게 했다.

완만하게 이어진 내리막길을 따라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뛰었다. 그리고 한참을 달려가다 길 옆에 있는 작은 바위 뒤에 쪼그리고 숨었다. 그 정도면 충분히 멀리 왔다고 판단했던 것일까? 아니면 혹시 너무 빨리 뛰어서 내가 이쪽으로 온 것을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그래서 누군가 보기 전에 숨어버려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하지만 내가 정말로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었다면, 그것이 깨지는 데는 그다지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내 느낌으로는 제법 긴 시간 동안의 대치 상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난 바위 뒤에 몸을 감춘 채로 한참을 숨어 있었다. 간혹 고개를 삐죽이 내밀어 내가 튀어나온 대열의 상황을 확인하기도 했다. 그런 긴장된 상태가 얼마나 오래 계속되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그런 상황이면 대개 그렇듯이 실제보다 훨씬 더 길게 느껴졌을 것이다. 내 작은 심장은 틀림없이 금방이라도 터져버릴 것처럼 조마조마했을 것이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선생님은 나를 데리러 오지 않았고, 다른 누군가를 보내 설득하려는 시도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얼마 후 아이들의 행렬은 내가 벗어난 길을 따라 산등성이 반대편으로 사라졌다. 그때부터 내가 할 일은 집을 향해 여유롭게 걸어가는 것뿐이었다.

그 이후의 시간에 내가 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일상이란 게 늘 그렇듯이 그날 더 이상의 특별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산을 내려오는 동안 내가 무언가 금지된 행동을 했다는 사실마저도 까맣게 잊어버렸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이 지나면 끝이라고 어린 나는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님에겐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면서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선생님에게 인사를 했다. 정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것으로 상황이 종료되었더라면 좋았겠지만, 불행하게도 선생님은 내가 저지른 행동에 대한 기억을 고스란히 되살려 놓았다.

나는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매를 맞았다. 벌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그날 수업이 끝날 때까지 나는 교실에 들어가지 못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반성하는 모습을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혼자 복도에 꿇어앉아 규칙으로부터 튕겨져 나갈 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맛봐야 했다. 일상이란 대개 특별한 즐거움도 슬픔도 없는 것이지만, 그 일상을 박탈 당하는 것만큼 큰 벌은 없다는 것을 너무 어린 나이에 알아버린 것이다. 텅 빈 복도는 몹시도 낯설었다. 언제나 다정했던 선생님의 표정이 차갑게 변해버린 것도 슬펐지만, 그보다 그런 상태가 얼마나 오래 계속될 것인지 짐작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 더 두려웠다. 내가 정말 견딜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었다.

결국, 종례 시간이 되었을 때 나의 고집은 꺾이고야 말았다. 돌아보니 그 순간이 바로 아주 잘 길들여진 한 사람의 소시민으로 내가 다시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모험에 대한 나의 욕구는 아주 적절하게 억압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살아온 날들이 지극히 평탄했던 것만은 아니다. 사실 그 이후로도 나는 몇 번인가 길에서 이탈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갈림길에 설 때마다 그때와 비슷한 두려움을 나는 떨쳐내지 못했다. 내 욕망의 시소 반대편 자리에는 언제나 비슷한 무게의 두려움이 놓여졌고, 자의였든 타의였든 올라간 만큼 결국은 내려와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도 믿고 있다. 여덟 살 적 그날이 그랬던 것처럼, 세상엔 내 의지로는 거부할 수 없는 불가항력이 힘이 있다는 것을. 어느 순간 그런 힘이 나를 다시 부르면, 가보지 못한 미지의 어떤 삶을 향해 나는 또 뛰쳐나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때, 집요하게 나를 지배해온 중력과 관성의 법칙을 거역하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