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기록 없는 여행의 기억 4 - 캄캄한 밤 캄캄한 기억

추락주의 2004. 8. 27. 14:54

어두워지자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 이문재 <노독> 중에서

 

마침내 우리 일행은 Beartooth를 무사히 넘어 Yellowstone의 북동쪽 입구에 도착했다. 첫날의 목적지로 정한 Canyon Village까지는 거기서 약 80km를 더 가야 한다. 이미 해가 기울기 시작한 오후. 조금은 서둘러야 했지만, 그래도 몇 번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풍경이 나타나 우리의 발목을 붙들었다. 아래의 사진은 그런 풍경 중의 하나. 그날 나는 수첩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먼 능선을 넘어 한 무리의 말 탄 인디언들이 나타날 것만 같은 풍경 속으로 들어왔다.”

 

 

리가 Canyon village에 도착했을 때는 벌써 땅거미가 지기 시작한 늦은 오후였다. 그런데 예약을 하지 않았다면 방을 구하기 어려울 거라고 한다. 마침 그날이 노동절 연휴가 시작되는, 이른바 성수기였기 때문이다.

 

다행히 우리는 예약이 취소된 숲속 오두막을 하나 얻을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하마터면 잘 곳을 찾아 Cooke city나 Silver gate까지 왔던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난감한 지경에 빠질 뻔했다.

 

Canyon lodge의 마음씨 좋은 직원은 친절하게도 다음날 묵을 숙소까지 알아봐주겠다고 했다. 그녀 덕분에 우리 일행은 한가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고, 그만하면 괜찮은 시작이었다.

 

 

우리가 오두막에 들자 곧 해가 졌는데, 문을 열면 바깥에서 칠흑 같은 어둠이 찬 공기에 섞여 스며들었다. 통나무로 지은 서부시대 풍의 카페에서 우리 일행은 맥주를 마시며 긴 여정의 첫날을 무사히 마친 것을 자축했다. 맥주에서는 독특한 향이났다. 그러나 지금은 지워진 향기.

 

그런데 왜 이렇게 캄캄한 걸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걸까. 길도 보이지 않게 어두웠던 숲 속에서 밤새 풀벌레들이 울었었는지, 나도 그 벌레들처럼 울고 싶었었는지, 아무리 애를 써봐도 기억의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더 이상 없다. 암전.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