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 길

기록 없는 여행의 기억 5 - 오 셰인

추락주의 2004. 9. 1. 00:35

너를 위해 나를 위해

내가 모르는 다른 모두를 위해

거기 있거라 지금 있는 거기 있거라

옛날에 있던 그 자리에

거기 있거라

- 자크 프레베르 <이 사랑> 중에서

 

둘째 날 우리는 Yellowstone의 Grand Canyon으로 향했다. 햇빛이 아주 눈부신 아침이었다. 계곡을 따라 몇 군데의 View point를 돌았다. 그때는 Arizona의 Grand Canyon을 보기 전이었으므로 비교가 되지 않았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규모면에서는 Arizona의 Grand Canyon에 당연히 못 미치고, 오묘한 아름다움으로 따지자면 설악산의 천불동보다 못했던 것 같다.

 

 

아침이면 우리는 지도를 보며 그날 어느 곳을 들려 어디까지 갈 것인지 정하곤 했다. 여행 기간 동안 내내 그런 식이었다. 궁극적으로 아흐레째 되는 날 Billings에서 2시 15분에 Chicago로 돌아가는 비행기를 타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Grand Teton을 따라 Jackson까지 내려갔다 오기로 했는데, 지도를 편 다음 손가락을 짚어 거리를 가늠하고 시간을 계산하고 상상하고 그리고는 출발했다.

 

거대한 유방이라는 뜻을 가진 Grand Teton은 Yellowstone의 남쪽에 이어져 있는 또 다른 국립 공원인데, 서부영화 셰인(Shane)의 무대가 바로 그곳이다.

 

셰인은 1953년에 만들어졌고 우리나라에는 1956년에 개봉되었다. 내가 세상에 태어나기 훨씬 전의 영화지만, 나는 TV에서 그 영화를 본 적이 있다. 영화 셰인을 가리켜 ‘서부영화의 시’라고 하는 사람도 있는데, Grand Teton의 서정적인 풍경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런 평가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도 떠나가는 셰인을 부르는 조이의 안타가운 메아리가 울릴 것만 같은 풍경이 거기 있다. 노을이 질 무렵이었다면 분위기가 더 잡혔겠지만, 우리가 그곳을 지나갈 때는 아쉽게도 눈부신 한낮이었다.

셰인의 OST, 조이의 메아리를 들을 수 있다

 

Grand Teton으로 가기 위해 Yellowstone의 남쪽 출구로 가던 중 잠시 길이 막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문제의 원인은 바로 들소였다. 들소가 길을 막은 것보다는 바로 눈앞을 지나가는 들소를 구경하느라 차들이 죄다 거북이걸음을 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 녀석이다. 아주 느긋하게 걷고 있다. 하긴 거기에 길이 생기기 전부터 그 땅은 조상 대대로 저들의 것이었으므로 급하게 비켜줘야 할 까닭이 없었을 것이다. 차창을 내리고 한 컷 찍었는데, 카메라를 한두 번 받아본 폼이 아니다. 내 조그만 자동 카메라 따위는 전혀 의식하지 않는다.

 

기억은 증발한다. 시간이라는 햇볕 아래에서. 그리하여 마침내는 몇 낱의 알갱이만을 남긴다. 사진은 그런 기억의 화석이다. 1994년 9월 4일. 그날 역시 몇 장의 화석을 남기고 내 잊혀진 역사 속으로 묻혔다.

 

 

-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