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라비야우공간

벤자민고무나무

추락주의 2004. 9. 16. 19:20

S는 바쁘다. 정확히 말하자면 해야 할 일이 많아서 바쁘기보다는, 해야 할 일을 찾는 데 바쁘다. 다른 많은 사람들처럼 그도 끊임 없이 할 일이 있어야만 마음이 놓이는 병을 앓고 있다. 그러나 그 병에 걸린 사람들은 대개 자신이 병에 걸렸다는 사실조차 모르고 지낸다. 나는 그런 사람을 많이 봐왔다.

“자기, 바빠?”

S가 들여다보고 있는 서류철 위로 노랗게 물든 이파리 하나가 툭 떨어진다. 오후 4시 25분을 지나고 있을 때였다. 그것은 내가 S를 부르는 방식이다. 뭔가 할 말이 있을 때 나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잎사귀 하나를 슬쩍 내려놓는다. 그리고는 기다린다.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엽서. 거기 뭔가를 채워 넣는 것은 S의 몫이다.

“입술이 다 부르텄네? 많이 피곤한가 봐.”

고개를 든 S의 얼굴이 많이 지쳐보인다. S는 나를 보더니 말없이 살짝 웃는다. 나는 S의 지금 같은 표정이 참 좋다.

평소에 S는 좀처럼 웃지 않는다. 어쩌다 웃을 일이 있어도 표정이나 소리를 최대한 억제해서 웃는다. 지금처럼 자신이 웃고 있다는 것을 겨우 알릴 수 있을 뿐이다. 뿐만 아니라 S는 울거나 화를 내느라 얼굴을 찌푸리는 일도 거의 없다.

이렇게 말하면 마치 S가 아무런 감정도 없이 메마른 사람처럼 느껴지겠지만, 그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다만 S는 무표정한 얼굴이 자신과 가장 잘 어울린다고 생각할 뿐이다. 그래서 그 안에 표정을 만들어내는 모든 감정들을 가둬버리는 것이다. 하지만 눈만큼은 그도 어쩔 수가 없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어느 밤이었다. S는 늦게까지 빈 사무실에 혼자 남아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고, 두 번째 벨 소리가 끝나기 전에 그는 수화기를 들었다. 아주 나지막한 목소리로 드문드문 무슨 말인가를 했는데, 내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말은 딱 한마디뿐이었다.

“그냥 거기 있어주기만 하면 돼.”

그 후로 꽤 긴 침묵이 흘렀고, S는 힘없이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나를 보더니 혼잣말처럼 이렇게 중얼거렸다.

“만약 내가 자신 있게 웃을 줄 알았다면, 아마 내 인생의 색깔이 달라졌을 거야.”

S는 입 꼬리를 보일 듯 말 듯 올리고 웃는 표정을 지었지만, 오히려 그것이 더 쓸쓸해보였다. 모르긴 몰라도 S는 자기 자신이 무채색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축 처진 그의 좁고 여윈 어깨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묵묵히 서있는 것 말고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내 푸른 그늘 속에서 언젠가 그도 푸르게 빛났으면 하고 마음 속으로만 바랬다.

그날이 바로 나와 S가 처음 대화를 나누기 시작한 날이었다.

내가 S의 사무실로 옮겨온 것은 지난 봄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자리 바로 앞에 놓여졌다. 나는 벤자민고무나무. 분류학상 쌍떡잎 식물 쐐기풀목 뽕나무과에 속한다. 나의 먼 조상은 인도에서 왔다. 학명은 Ficus Benjamina이지만, 언제부턴가 S는 나를 그냥 '벤지'라고 부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