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1막 1장. 타누자 밤이 깊어 가는 LA 국제 공항, Gate 102 앞에 나는 앉아 있다. 나는 서울행 비행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지금 내 맞은편에는 매혹적인 분위기를 가진 아가씨가 앉아 있다. 둥그스름한 얼굴에 까무잡잡한 피부, 거기다 굵직굵직한 이목구비가 한눈에 봐도 인도 여자다. 어쩌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살짝 웃어준다. 그러면 나도 그녀에게 특유의 어색한 웃음을 보여준다. 뭔가 기분 좋은 일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 혹시 아주 오래된 영화 신상(Haathi mere Saathi)을 기억하는지. 주인을 위해 평생을 헌신하다 마침내 목숨까지 바치는 코끼리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다. 아마 초등학생이었을 때 그 영화를 봤던 것 같다. 코끼리가 죽는 장면에서는 마구마구 울어버렸던 기억이 생생하다. 그 영화에 나오는 여배우의 이름은 타누자다. 인도 여자들이 다 비슷비슷해 보이는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영화 속의 타누자와 내 앞의 그녀는 닮았다. 그러니까 지금부터 그녀의 이름은 타누자다.
1막 2장 .존의 등장 그는 금발에 파란 눈을 가졌다. 조금 전에 장면 속으로 불쑥 들어와서는, 타누자의 오른쪽 세 번째 자리에 앉았다. 그가 타누자에게 인사를 건넨다. 그를 바라보는 타누자의 눈빛과 웃음이 왠지 심상치 않아 보인다. 나는 녀석에게도 이름을 붙여준다. 녀석의 이름은 존이다. 일단은 그게 제일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그래서 누군지 잘 모르는 사람을 칭할 때 John Doe 같은 표현을 쓰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이름이 존이 된 데에는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내 의도를 알면 기분 나쁘겠지만, 속어에서는 존이 화장실을 뜻하기도 한다. 존의 등장으로 팽팽한 삼각구도가 시작된 것은 아니다. 그 이후로 게임은 일방적으로 그리고 아주 빠르게 진행이 되었으며, 타누자는 두 번 다시 내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 녀석은 타누자의 진짜 이름을 알아낸 눈치다. 1막 3장 .선수 어느 틈에 존은 타누자의 옆 자리로 옮겨 앉아 그녀의 손을 주물럭거리고 있다. 손금을 보는 혹은 보는 척하는 모양새다. 아 저건 우리나라에서도 한물 간 수법인데. 타누자의 손바닥을 들여다보며 둘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얼굴에 웃음이 사라질 새가 없다. 존 저 녀석, 동양적인 수법까지 통달한 선수임이 분명하다. 가엾은 타누자. 탑승시간이 가까워지자 둘은 문득 생각이 났는지 각자의 탑승권을 꺼내 자리를 맞춰본다. 그리고는 곧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바뀐다. 존이 말한다. 무슨 말인지는 뻔하다. 일단 타서 승무원에게 자리를 바꿔달라고 말해보겠단다. 2막. 열정과 고통 사이 창쪽에는 좌석이 셋이다. 그 중 창가 자리가 내 자리이고, 가장 바깥자리가, 하필이면, 타누자의 자리다. 존은? 승무원과 두어 차례 무슨 말을 주고 받더니 결국 타누자의 옆 자리를 차지하고 만다. 비행기가 이륙한 직후 기내는 곧 소등 되었다. 담요를 덮고 잠을 청했다. 얼마쯤 잤을까. 요의尿意가 나를 깨웠다. 눈을 떴을 때 주변은 여전히 어둡고 또 조용했다. 딱 한가지 야릇한 소리만 빼면. 그 소리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들려왔는데,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의식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 소리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나는 내 자리에 갇히고 말았다. 제기랄. 존과 타누자는 키스를 나누고 있다. 그들의 체온은 틀림없이 평상시보다 더 뜨거울 것이다. 그러면 담요 속의 사정은? 그건 나도 모른다. 어쨌든 그 야릇한 소리는 바로 두 사람의 입술과 입술이 접촉하면서 내는 소리에 달뜬 숨소리가 칵테일 된 것이었다. Kiss of fire. 도대체 언제부터 저러고 있었던 걸까. 아니다. 어느 틈에 벌써 저렇게 진한 사이로 발전한 것일까. 벼락치듯. 그간 사정이 어찌 되었거나, 내가 화장실에 가기 위해선 그 둘을 모두 일으켜 세워야 한다. 좌석 간격의 구조적 한계로 인해 그 분위기를 깨지 않고 나갈 수 있는 방법은 없기 때문이다. 이코노미의 비애. 그런데 민망해서 입이 떨어지질 않는다. 한참을 주저주저하다가 포기하고 만다. 그래 차라리 참고 말자. 다행히 아직은 견딜 만하니까. 적당히 하다가 멈추겠지. 그때까지만 기다리자. 그러나 내 희망과는 달리 그들의 열정은 좀처럼 식을 줄을 모른다. 존과 타누자의 키스가 뜨거워질수록 나의 고통은 점점 심해진다. 이따금 승무원이 지나가기도 했지만, 그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다. 시간은 왜 이리도 더디게 가는지, 인내심이 거의 한계에 이를 즈음 그야말로 기적적으로 기내에는 다시 불이 켜지고 승무원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호놀룰루 공항에 곧 착륙한다는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그때서야 비로소 존과 타누자는 입을 떼고 숨을 쉰다. 막간 마침내 비행기는 중간 기착지인 호놀룰루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이곳에서 비행기는 약 두 시간쯤 머물다 다시 서울로 출발할 예정이다. 내가 공항의 이곳 저곳을 별 생각 없이 어슬렁거리는 동안, 존과 타누자는, 물론 그들 역시 공항을 벗어나진 못했겠지만, 어쨌든 하와이에서의 달콤한 데이트를 즐기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내가 그들의 로맨스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한 시간이 넘게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해야만 했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게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이었는지. 3막. 이별예감 비행기는 활주로를 향해 선회하기 시작했다. 나는 말없이 창 밖을 내려다본다. 새벽의 여명이 지상의 윤곽을 조금씩 드러내고 있다. 잠시 후 비행기는 내 생애에 가장 길었던 밤의 끝 자락에 내려앉을 것이다. 귀가 먹먹하다가 아프다. 존과 타누자는 말을 잊은 모양이다. 조금 전, 수첩을 꺼내 서로의 주소를 주고받은 이후로 계속 조용하다. 나는 이제 기척만으로도 그들의 모습을 그려낼 수 있다. 타누자는 존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듯 기대어 있을 테고, 타누자의 어깨를 감싼 존의 팔에는 힘이 들어가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안타까움을 확인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짧고 아쉬운 비행이었겠지만, 그러나 나에게는 참으로 길고 지루한 비행이었다. 4막. 엔딩 여기서 오른쪽 길은 입국심사대로 이어진다. 김포 공항이 최종 목적지가 아닌 환승객들은 왼쪽으로 가야 한다. 존과 타누자도 이제는 손을 놓아야 한다. 그러나 손이 떨어진 뒤에도 눈길은 오래 떨어지지 않는다. 보이지 않을 때까지 그들은 뒤를 돌아본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몹시 애틋한 이별의 장면이다. 누가 알겠는가. 그들이 불과 열 일곱 시간 전에 만났다는 사실을. 에필로그 그런데 그들은 다시 만났을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