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roring Valerian Albanov 1
세인트 안나 호는 그 순간에도 여전히, 하얗게 얼어붙은 꿈을 꾸고 있었다. 1914년 4월 10일, 발레리안 알바노프는 마침내 북극해의 얼음 황무지 위로 내려섰다. 배가 해빙에 갇힌 지 벌써 1년 반이나 지난 뒤였다. 그 동안 세인트 안나 호는 북쪽으로 4,400km를 떠밀려 올라갔다. 떠날 것이냐 남을 것이냐, 그것이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삶이 그들에게 던진 마지막 질문이었다. 영화 베니스의 여름에서 캐더린 햅번은 이렇게 말한다. “난 늘 언제 떠나야 할지 몰라서 파티에 너무 오래 머무르곤 했어요.” 떠나기 전날 밤 세인트 안나 호에서는 마지막 파티가 열렸다. 13명의 선원이 그를 따라 나섰고, 10명은 남았다. 알바노프의 일기는 그때부터 시작된다. 탈출 첫날, 알바노프 일행은 남쪽으로 6km를 걸었지만, 바람이 그들을 붙잡고 있는 사이에 그들이 딛고 있던 얼음은 북쪽으로 41km를 올라갔다. 시작부터 희망은 더 멀어졌다. 그들은 매우 더디게 앞으로 나아갔다. 알바노프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의 속도를 거북이에 비유한다면 거북이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11일째 되던 날에는 일행 중세명이 배로 돌아갔다. 그가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할 적은 그를 둘러싼 극한의 환경만이 아니었다.희망을 갉아먹는 눈에 보이지 않는 좀 벌레와도 싸워야만 했다. 바로 권태였다. 다시 알바노프의 일기 한 토막을 들여다보자. “나는 한 손에 스키폴을 쥐고 있었는데, 스키폴은 정확하게 똑 같은 형태를 그리며 앞뒤로 반복적으로 움직였다. 반원을 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가, 천천히 뒤쪽으로 갔다가 다시 앞으로 돌아오는, 똑 같은 동작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스키폴이 눈에 부딪히며 규칙적으로 소리를 내어 마치 우리가 움직인 거리를 재고 있기라도 하는 것 같았다. 그 소리는 마치 '멀었다, 아직 멀었다'라는 소리처럼 들렸다. 생각이란 생각은 모두 사라지고 똑 같은 기계적인 동작만이 중요한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는 몽유병자 같았다.” | 만약 내가 그들 중 한 명이었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한번 익숙해진 환경에서쉽게벗어나지 못하는 성격. 미루어보건대, 아마 나는 남기로 한 10명에 포함되었을 것 같다. 물론 내가 그때까지의 1년 반을 잘 견뎌냈다면 말이다. 하지만 나는 왠지 그 선택의 순간까지 가보지도 못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또만약 내가 배를 떠난 14명에 들어있었다고 하자. 그러나 그 경우에도 나는 아마 되돌아간 세 명 중 한 명이 되었을 것 같다. 쉽게 단념하고 나서 오랫동안 후회했을 것이다. 그들은 마치 꿈을 꾸듯 걸었다. 그리고 그 꿈은 악몽이었을 것이다.진짜 악몽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시작된다. 얼어붙은 바다 위에서 그가 반복했던 그 끝없는 단순함은, 그로부터 90년 뒤 21세기를 살고 있는 어떤 한 사내의 일상이 되었다. 사내는 끝없이 소리를 따라간다. 그리고 오늘도 그 소리는'너는 멀었다, 아직 멀었다' 말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