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일하는 건물은 23층이다. 23층에는 구내식당이 있다. 점심을 먹으며 생각을 했다. 여기서 뛰어내리면 죽을 수 있을까?

뛰어내렸을 때 죽는 순간은 내 몸이 바닥에 닿는 순간이 될 것이다. 그 순간은 너무 짧아서, 분모가 거의 무한대인 극한의 시간차로 삶과 죽음이 판가름 날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찰나의 순간을 지나 과연 바닥에 닿을 수 있을까? 일단 뛰어내려 보자. 실험만큼 확실한 증거는 없을 테니까.

몸을 날리고 나서 얼마쯤 후에 내 몸은 23층과 바닥의 딱 중간에 이를 것이다. 그때까지의 체감시간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실제 체공 시간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다. 중력가속도가 질량과는 상관없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바로 배부른 자나 배고픈 자나 적어도 죽음 앞에서만은 모두가 평등하다는 자연의 섭리다.

어쨌든 나는 이제 절반을 지나왔으므로, 내 앞에는 틀림없이 나머지 절반의 거리가 남아 있을 것이다. 그 중간점을 지나쳐 계속 떨어져내리다 보면, 또 얼마쯤 후에 나는 다시 나머지 절반의 중간에 이르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절반의 거리가 또 남는다. 계속해서 그 절반을 더 떨어지더라도 또 다른 절반이 남는다.

그렇게 몇 번쯤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엔 갈 길이 막막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계속 떨어지자. 어차피 이젠 멈출래야 멈출 수도 없는 상황이다. 내 의지로 뛰어내렸으나 내 의지로 멈출 수는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운명이다. 그러니 그냥 맘 편하게 떨어지자.

그러나 아무리 떨어져내려도 내 앞엔 여전히 더 떨어져야 할 절반이 남아 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나는 영원히 바닥에 닿을 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제기한 이 상황은 수학에서 말하는 제논(Zenon)의 역설을 표현만 약간 달리한 것이다. 그 속에 어떤 오류를 내포하고 있는지 굳이 논리적으로 증명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이미 그것이 우리가 믿고 있는 어떤 진리에 위배된다는 것을 선험적으로 터득하고 있다.

실제로 언제부턴가 높은 곳에서 투신하는 사람들이 부쩍 많아졌다. 물론 그들 중에는 간혹, 죽지않고 멀쩡하게 살아 남아 이 궤변적인 주장을 온몸으로 증명해 보이는 듯한 이들도 있기는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그들은 아이러니 하게도 가장 불행한 결정을 내린 순간에 가장 운이 좋았을 뿐이다. 마지막 순간까지 운이 좋지 못했던 나머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내가 이르지 못했던 그 찰나의 순간을 지나 삶과 죽음의 영역을 달리했다.

그들은 추락 이전에 이미 추락을 경험했거나, 추락이 너무 두려운 나머지 추락을 선택한 사람들이다. 몸을 던지기 이전에 이미 역설적인 상황 속에 내던져졌던 것이다. 그들은 제논의 역설이 허구임을 증명했지만, 스스로 또 다른 역설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들이 결코 이를 수 없었던 것은 바닥이 아니라, 아마도 높이를 추구하는 동안 꾸었던 꿈이었을 것이다.

내가 그렇게 어떤 높이를 두고 절반과 절반과 절반과 또 절반을 나누고 있는 사이에, 같이 식사를 하던 동료들은 밥그릇을 다 비웠다. 나는 절반도 못 먹고 숟가락을 놨다. 하지만 다행이다. 내 두 발이 아직은 안전한 곳을 딛고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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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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