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란이 사라졌다! 하룻밤 사이에, 흔적도 없이.

그런데 이상한 일은, 수반은 그대로 있고 숯과 풍란만 없어졌다는 것이다. 사무실엔 출입 잠금 장치가 되어 있는데다, 만약 누군가 가져간 것이라 해도 욕심이 생겼다면 통째로 가져갔을 것 아닌가. 탐을 낼 만큼 값비싼 것도 아닌데, 도대체 풍란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상황이다.

그 풍란은 작년 12월에 생일선물로 받은 것이다. 나무를 깎아 만든 암갈색의 투박한 반(盤) 위에 숯 몇 개가 놓여 있고, 그 사이에 착근된 소엽 풍란 두 포기가 자라고 있는, 소박하면서도 운치가 있는 숯부작이었다. 살아 있는 것을 선물로 받은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화려하지 않아서 내게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었다.

풍란은 주로 남쪽 섬에서 자란다. 바람이 잘 통하고 습기가 많은 곳을 좋아한다는데, 답답하고 건조한 이 사무실을 견뎌낼 수 있을까? 내년 여름에 꽃이 피는 것을 볼 수 있을까? 아마 그런 걱정을 했던 것 같다. 휴지 상자가 있던 자리를 치우고 거기 풍란을 놓으며, 꽃이 피지 않아도 좋으니 부디 오래 살아만 남으라고, 살아 남는 것이 문제라고, 마치 내 자신에게 들려주듯 말을 건넸었다.

그런데 사라져버렸다. 감쪽같이!

누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 제 스스로 떠난 거겠지. 여기서는 살아남을 자신이 없었던 것일까? 내 곁에 있으면서도 내내 바닷소리만 그리워했던 것일까? 그러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진 것일까? 이 답답한 공간을? 전망 부재의 삶을?

풍란이 내게로 온 것도 제 뜻은 아니었겠지만, 그것을 여기 놓아둔 것도 나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여기서 나가봐야 어디로 간다고 그렇게 훌쩍 가버렸을까. 빈 수반을 보니 마음 더욱 허전하다. 차라리 아무 것도 남겨 놓지나 말지. 내가 이렇게 허전해 하고 있는 줄 알기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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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추락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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